1. 한식의 근간, 장맛의 정체성 – 간장·된장·고추장의 뿌리
한국 음식의 깊은 맛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장맛’이다. 간장, 된장, 고추장은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한국 음식문화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근간이며, 조상들의 지혜와 시간, 그리고 자연이 빚어낸 고유의 식문화 자산이다. 전통 장류는 대개 ‘메주’라는 발효 원형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메주를 띄우고 염수를 부어 숙성시키는 방식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발효 기술의 결정체로,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 식문화이다.
장맛은 단순히 입에 느껴지는 맛을 넘어 ‘기후, 풍토, 삶의 방식’이 반영된 생활문화 그 자체다. 같은 간장이라 해도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에서 맛이 다르고, 집집마다 된장의 농도와 향은 모두 다르다. 이런 다양성은 결국 지역과 가문의 전통을 보여주는 무형의 정체성이며, 단순한 음식이 아닌 전승된 ‘지식과 기술’로서의 문화적 의미를 가진다.

2. 장 담그기, 삶과 계절을 잇는 의례 – 간장·된장의 제조와 발효 과정
간장과 된장의 핵심은 발효다. 이 발효는 자연과 인간의 협업을 전제로 하며, 장을 담그는 과정은 단순한 요리법이 아니라 하나의 연례행사이자 전통 의례로 자리 잡았다. 일반적으로 매년 음력 정월에서 3월 사이, 추위가 한풀 꺾이고 공기가 맑아지는 시기에 장을 담근다. 이때 사용되는 메주는 전년 가을부터 정성껏 만들어 겨울 내내 띄운 것으로, 가마솥에 콩을 삶고 찧어 성형한 뒤 볏짚에 묶어 자연 발효시킨다.
이처럼 전통 장 담그기에는 위생이나 맛뿐 아니라 계절의 변화, 가족 간의 협업, 공동체의 생활 패턴이 함께 녹아 있다. 장독대에 장을 담그는 일은 집안 어른의 몫이었고, 그 방식은 세대를 거쳐 구술 또는 직접 시연을 통해 전승되었다. 메주를 띄우는 온도, 염도의 조절, 발효 기간에 따라 전혀 다른 장맛이 나기 때문에 이 기술은 단순한 요리법을 넘어 ‘무형문화재적 가치’를 가지는 고도의 생활 지식으로 평가받는다.
3. 고추장과 한식의 세계화 – 전통이 산업과 만날 때
고추장은 조선 중기 이후 고추가 전래되며 발전한 장류로,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대표적인 사례다. 고추장의 제조 방식은 된장이나 간장과는 달리 찹쌀이나 보리 등의 곡류에 고춧가루, 메줏가루, 엿기름, 소금을 배합하여 발효시키는 방식으로, 조리법 자체가 지역에 따라 상당한 다양성을 갖는다. 특히 전라도의 고추장은 단맛이 강하고, 경상도의 고추장은 염도가 높으며, 충청도에서는 장맛이 구수하고 부드럽다.
최근에는 고추장을 비롯한 한국 장류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K-푸드 열풍과 함께 고추장은 김치와 더불어 대표적 수출 식품이 되었고, 미국과 유럽에서는 고추장 소스나 발효장 기반 소스가 고급 식당에서 사용되는 등 ‘전통장류의 산업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전통방식이 사라지고 획일화된 맛으로 대체되는 우려도 함께 따른다. 따라서 세계화 속에서도 전통의 원형을 지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고추장의 무형문화재적 가치를 온전히 계승할 수 있다.
4. 전통 장류의 문화유산적 가치 – 생활 속 지식의 보호와 계승
2020년, 한국의 전통 장 담그기 문화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향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장이 한국인의 밥상을 책임져왔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제조 방식과 전승 형태가 공동체 문화의 본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 장류는 ‘사람과 자연이 시간 위에서 만나 빚은 맛’이며, 이를 만드는 행위는 식문화와 의례, 기술, 교육이 결합된 복합 문화유산이다.
오늘날 많은 가정에서 장을 직접 담그기보다는 시판 제품을 사용하지만, 일부 농촌 지역과 장을 전문으로 하는 전통 장인들은 여전히 수공의 방식으로 장을 담그고 후대에 전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장 문화를 보존하고 재해석하는 현대의 문화유산 관리자라 할 수 있다.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도 전통장 아카이빙, 체험교육, 다큐멘터리 제작 등을 통해 그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으며, 이는 장맛을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문화의 맛’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이라 볼 수 있다.
'한국 무형문화유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가야금산조, 인간문화재의 숨결을 따라가다 (1) | 2025.07.30 |
|---|---|
| 한국 전통 무예 태권도의 역사와 문화유산 가치 (3) | 2025.07.30 |
| 전통 한옥 건축과 무형문화재 장인의 가치 (0) | 2025.07.30 |
|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 도자기장인의 혼을 잇다 (3) | 2025.07.30 |
| 정월대보름 지신밟기: 마을을 지키는 전통 의식 (0) | 2025.07.30 |
| 한지장(한지 제작) 기술의 비밀과 현대적 활용법 (7) | 2025.07.30 |
| 제주 해녀 문화: 바다와 생명을 잇는 여성의 전통 (5) | 2025.07.30 |
| 김장문화의 무형문화재 지정 이유와 지역별 특징 (3) | 2025.07.30 |